우주인은 가늠할 수도 없는 무한의 공간에서 지구를 바라볼 때 ‘왜 저 작은 구(球) 안에서 아옹다옹 살았을까?’를 반성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는 번뇌와 갈등, 반목 속에서 매일 아니 매시간을 살아간다. 돈 문제, 가정사(事), 직장, 취업, 학업 등 하나가 해결되면 그 빈틈을 용납하지 않고 또 다른 고민이 병아리 품은 암탉처럼 자리 잡는다. 정도에 차이만 있을 뿐 사람은 다 같은 처지일 듯싶다. 명상도 해보고 더러는 잊어보기 위해 공연이나 책도 가까이 해보지만, 현실은 늘 편협하고 단편적인 고뇌로 스스로를 또 각박하게 만들곤 한다.
보통의 사람들이 느끼는 번뇌의 상당 부분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게 아닌가 한다. 이해관계, 거래 등에 함몰되어 뜨거운 물만 부으면 바로 먹고 폐기되고 마는 컵라면처럼 가볍게 사람을 만나고 곧 잊히게 되는 게 요즘인 듯해 씁쓸하다. 공자가 말했던 종심(從心, 일흔에는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이 훌쩍 지난 나이임에도 누구를 만나고 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항시 어렵기만 하다.
필자는 복이 많아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일찍이 일깨워준 분이 많이 계셨다. 그중에서 시인 구상 선생님과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님은 빼놓을 수 없는 분들이다. 내년이면 탄생 100주년과 서거 15주년이 되는 구 선생님은 생전에 필자에게 늘 “인연은 살려서 써라”시며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셨다. “세상에는 시가 필요해요.” 선생이 메모지에 남긴 유언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함을 알 수 있다. 선생이 곧잘 쓰시던 또 다른 표현 “온통 연탄 빛 탁류”는 작금의 현실을 함축적으로 꼬집고 있어 기성세대인 필자에게도 비수처럼 다가오곤 한다.
구 선생님께 “선생님! 제 차를 자가용처럼 편히 쓰세요” 했더니 염두에 두시곤 선생의 친구 故 정주영 회장이 보자며 “내 차를 보내겠네!” 하셨을 때, “나도 차가 있다네” 하시며 필자에게 전화하셔서 “내 차 좀 보내주게” 하셨던 격이 다른 선생님의 인연 공식은 지금까지도 커다란 교훈으로 남아있다.
이어령 장관님은 1960년대 초 삼성출판사 편집 고문으로 인연을 맺어 1972년 <문학사상> 창간 시 주간으로, 또 삼성출판박물관이 문을 열 때도 “이 박물관은 탑처럼, 씨앗처럼, 그리고 목관악기처럼 책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출판박물관의 주춧돌 위에 새겨진 김봉규, 종규 형제분의 이름은 활자의 자모처럼 앞으로 많은 의미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이분들의 가르침을 조금이나마 실천하고자 소셜 뉴스 위키트리 공훈의 대표 등 전도가 촉망되는 젊은이 30여 명을 모아 10여 년 전부터 필자는 월단회(月旦會)라고 하는 소담한 모임의 안내자 역할을 해오고 있다. 이어령 장관님의 가르침은 이 모임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으로서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시는 이 장관님은 지금까지도 필자의 요청에 빠짐없이 응해주고 계시며 월단회에는 멘토로 참석하시며 늘 금과옥조의 가르침을 주고 계신다.
필자가 소임을 맡고 있는 문화유산국민신탁을 믿고 문화유산의 보존과 보호에 앞장서고 있는 13,000여 명의 회원님들은 무엇보다 소중한 만남과 인연의 보고(寶庫)가 아닐 수 없다. 강서구 관내 박물관과 미술관의 모든 책임을 맡고 있으면서도 한결같은 겸손함으로 필자에게 관장을 추천해 줄 것을 요청해 주신 김병희 강서문화원장님. 30여 년의 인연을 살려 거리를 멀다 않고 안부를 주고받고 있는 미국 버지나아주 한인회 홍일송 회장, 평창동계올림픽 음악감독의 중책을 맡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가운데서도 입출국 시 빠지지 않고 안부를 전해주는 재일동포 피아니스트 양방언 선생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인연의 그물망이 필자의 오늘을 있게 했다고 믿는다.
이분들이 있어 미세먼지와 황사로 가득한 세상에서도 참 맑음이 있음을 보게 된다. 인연의 셈법은 반올림으로 종결되어서는 안되며 연속적일 때 우리의 삶은 한층 풍요롭고 살맛 나는 것 같다.


*1939년 출생. 동국대학교 경제학 학사. 제40회 문화의 날 은관문화훈장(2011), 제15회 자랑스러운 박물관인상 원로부문(2012). 現 삼성출판박물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