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서 열리는 6.15민족공동위원회 남·북·해외위원장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2018년 6월 20일 새벽길을 나섰다. 설렘과 기대 속에서도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9년간 단절된 남북 교류 협력이 민간 차원으로 처음 재개되는 이번 방북은 북한이 고향인 나로서는 더욱 남달랐기 때문이다.
애초 20명으로 꾸려진 남측 대표단 중 5명의 방북이 불허됐는데, 공교롭게도 그중 여성이 3명이었다. 결국 여성과 대표로는 혼자 참여하게 되었다.
떠나기 전날까지 갈지 말지 격론이 벌어지면서 어렵게 출발했던 평양에서의 3박 4일은 그야말로 쏜살같이 지나갔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북녘땅을 천천히 내려다봤다. 평양에서 마주친 모든 북측 관계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오늘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준 YWCA(한국여자기독교청년회) 속에서의 수많은 ‘만남’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장 첫 번째는 단연 YWCA와의 조우였다. 1968년이니 벌써 50년 전의 일이다. 이화여대 입학식 날, 학교생활을 안내하는 오리엔테이션에 YWCA 회원가입 안내가 있었다. ‘순진한’ 신입생들의 10% 정도가 그 자리에서 회원에 가입했다. 당시는 학생들이 활동할 수 있는 단체나 동아리가 별로 없었다. 같은 교회를 다니던 YWCA 선배에게 귀한 대접을 받으며 나의 YWCA 활동은 시작되었다.
YWCA는 이때부터 정말 많은 ‘만남’을 내게 선물했다. 1학년 여름방학 YWCA, YMCA, KSCF 세 기독청년단체가 서울대학교 수원 농대에서 개최한 하령회(여름대회)부터 강화도 전수리 농촌교회 봉사, YMCA 다락원 캠프 가을 수련회 등 기억도 가물가물한 크고 작은 다양한 행사에 참석했다. 이화여대 대학YWCA 회장으로 YWCA 전국 대회에 참석해 청년들에게도 이사 자리를 달라며 간곡히 호소했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18년 2월 6일, 한국YWCA연합회 제46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던 시간을 빼곤 대학YWCA 시절을 포함해 30여 년이 넘게 위원, 실행위원(이사), 임원을 맡으며 YWCA 활동에 최선을 다했다. 그동안 52개 지역YWCA와 300여 개에 달하는 부속기관에서 헌신하는 수많은 지도자, 활동가, 회원분들을 만났다. YWCA를 도와주는 협력기관과 단체 관계자들 역시 잊을 수 없다. YWCA 안팎의 한 분 한 분과의 만남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가운데 생물학에서 시작해 유전학, 뇌과학으로 학문의 끈을 놓지 않고 50살이 넘어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큰 행운이었다. 생명과학 관련 강의를 30여 년간 하면서 뇌가 생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관장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첨단 학문으로 뜨고 있는 뇌과학에 도전하게 되었다.
1년여간 암 환자들의 뇌파를 찍어 분석하고 뇌 훈련을 하는 과정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들을 만났다. 그들과의 만남은 나를 인간적으로 많이 성숙하게 만들었다. 신경과학을 강의하면서 1천 분의 1초 만에 정보가 전달되는 과정을 연구하고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아서 많은 고민을 하며 준비한다. 오늘날 신경과학은 뇌가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넘어 인간의 뇌가 외부 세계를 어떻게 인지하고 경험하면서 행동하는지 마음의 문제로까지 확장되는데, 이처럼 삶의 많은 영역이 뇌과학을 필요로 한다.
YWCA 회장이 된 지 5개월이 넘었다. 지금은 지난 세월보다 더 깊고 새로운 관계의 만남 속에서 더 큰 책임감과도 만나는 중이다. YWCA의 목적인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탈핵, 성평등, 평화통일, 청년운동의 과제를 매일매일 대면한다.
오늘도 나는 “서로 귀하게 여기라”는 하나님 말씀을 만나고 되새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과 이웃을 상호 존중하고 공동체에 기여하는 것이 곧 행복이고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이 성경 구절을 내가 맞닥뜨리는 수많은 만남과 교제, 실천을 통해 세상에 전달하는 것이 내게 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46억 년에 걸친 지구 역사 속에서 생명체가 지구상에 처음 출현한 시기는 20억 년보다 더 이전으로 보고 있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생물이 멸종됐는지는 알 수 없다. 진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생물은 멸종된다. 인류는 299만 년의 선사시대와 1만 년도 안 되는 역사시대를 거치며 자연에 의존해 살아왔다. 인간도,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과 문화도 자연의 법칙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70년 넘게 적대관계로 얼어있던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역사적인 대전환의 시기를 맞이하여 이 땅의 역사를 지켜온 여성들과 YWCA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성으로 감지되는 시대의 변화를 감성으로 다독일 줄 아는 지혜가 더욱 필요한 때다.


*1950년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과학교육과 및 동대학원 유전학 석사, 서울벤처정보대학원대학교 뇌과학 박사. 現 한국YWCA연합회 제46대 회장.
 
사진: 김신영 기자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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