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한 지인이 와서 나에게 물었습니다. “화승원”을 아느냐고. 그리고 현승훈 회장의 이야기를 합니다. 부산에서 평생 동안 수목을 심고 가꾸어 온 기업인이라 했습니다. 그 나무 사진과 이야기를 모아 출판하려고 하는데 그 서문을 부탁할 수 없겠느냐는 것입니다. 늙고 병든 몸입니다. 글은 물론이고 강연을 사양해 온 지도 오래 됩니다. 대답은 뻔합니다. ‘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예스’란 말이 흘러나온 것입니다. 
식목일에도 나무 한 그루 심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나무에 대한 관심과 글쓰기는 이미 20대부터 시작합니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가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내 작고 외로운 자리를 하나의 나뭇잎에서 보고 그것이 바람에 흔들릴 때에는 푸른 생명이 파동하는 우주공간을 엿들었습니다. 누웠다 일어서는 척추의 곧곧함, 하늘을 이고 살아가는 수직의 자세도 배웁니다.
내가 원고지 위에 나무 이야기를 쓰고 있을 때 누군가는 흙 위에 실제 나무를 심고 있었고, 돈을 모으는 것이 사업가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평생을 바쳐 나무를 모으는 기업인이 있었다는 놀라움, 그래서 내가 병든 가로수 길을 걷고 있을 때 어디에선가 나무꾼이 신선을 만나던 그런 숲 하나가 생겨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화가 아니라 KTX를 타면 반나절에 갈 수 있는 현실 공간 속에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의 화승원 수목 읽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그 숲의 근원에 있는 것은 슬픔이었다는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린 시절, 슬픔이 뭔지도 자세히 알지 못한 14살 때, 저는 어머니와 이별하였습니다. 병마와 싸우던 어머니는 저에게 이별하는 법이나 혼자 살아가는 법을 제대로 가르쳐 주시지도 않고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셨지요.” “언제부터, 왜 수목원을 가꾸려고 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현 회장의 대답입니다. 늙어서 더 이상 울 일이 없는데도 현 회장의 진솔한 글을 읽으며 눈이 축축해졌습니다. 나 역시 현 회장과 똑같은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대서만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모습은 “어린 시절 외갓집 마당에 있던 과목과 아버지랑 살던 집 마당의 정원수”로 이어집니다. 화초와 채소를 가꾸시던 외할머니의 손과 웃자란 정원수의 나뭇잎을 잘라주시는 아버지의 손길에서 배운 생명과 사랑의 힘이 하나하나의 나무로 변신해 간 것입니다. 어떻게 할머니의 채소밭과 아버지의 정원이 오늘의 저 큰 울창한 숲이 되고 큰 기업이 될 수 있었는지 그 궁금증을 좇다가 뜻밖에도 바로 이 소년이 천하의 수재들이 모인 경기고교에서 나에게 국어를 배운 학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60년 전 제자와의 만남, 한 사람은 생명자본으로 수목 이야기를 하고 한 사람은 실제로 나무를 통해서 생명의 숲을 가꾼 것입니다. 그리고 현 회장은 내가 글로 쓰려던 생명자본의 세계를 화승원 숲으로 실현한 것입니다.
나는 그 감동을 시로 적었고 현 회장은 그 서툰 글을 화강암 자연석에 새겨 화승원에 세웠습니다. 이렇게 60년을 한순간에 뛰어넘어 두 사람이 깊은 포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만들어 낸 생명의 나무 사랑이 나무와의 만남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스승의 날에 그 자제분들로부터 아름다운 꽃바구니를 받았고 자부님들이 정성껏 차려준 밥상과 회혼례 잔칫상까지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만남의 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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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사람이 그리워지면
오늘 화승원으로 가자.
거기에는 하늘과 땅 사이
나무와 나 사이
그리고 너와 나 사이
가시덤불이 없는 숲이 있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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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린 돌도 일어서는 생명나무가 있다하더라.
먼 바다로 떠난 배도 돌아오는 고향나무가 있다하더라.
오랜 친구도 낯설게 하는 새로운 아침나무가 있다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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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아산 출생. 서울대 국문과 학사, 동 대학 국문학 석사, 단국대 국문학 박사. 이화여대 교수, 88올림픽 문화행사 기획, 초대 문화부장관 등 역임. 저서로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축소지향 일본인><디지로그> 등 다수.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78), 대한민국 맹호훈장(1988), 대한민국 청조훈장(1992), 로얄살루트 마크오브리스펙트상(2006), 만해 대상(2008)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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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류병문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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