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김예지(40)가 수놓은 건반 위의 생은 빼곡히 배열된 시간의 악보였다.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야가 좁혀지고 시력을 잃게 되면서 육안이 아닌 심안(心眼)으로 세상과 마주한 그녀의 세계는 깊이만큼 넓고 넓이만큼 깊었다. 그녀는 유년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덕분에 희미하게나마 자연을 보고 교감할 수 있었고, 예술적 감수성과 감성을 키워왔다고 한다.

“2~3살 무렵에 확실히 안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됐대요. 눈을 맞추며 웃지도 않고, 밖에 나가면 자꾸 눈을 감아버렸으니까요. 어릴 때는 가까이 있는 사물의 색채나 모양도 어렴풋이 보였고, 큰 글씨도 읽었어요. 뚜렷하진 않아도 사람 얼굴이 이렇게 구성됐구나, 나름 인식했고요. 물론 보통 사람들이 ‘본다’는 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었죠. 시골 체험은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준 저의 큰 자산이에요. 어차피 안 보이니 혼자 별 상상을 다 했죠(웃음).”

맞벌이를 하신 부모님을 대신해 그녀를 돌봐주셨던 외할머니는 머리맡에서 늘 모차르트와 브람스의 자장가를 들려주셨다. 어릴 때부터 소리에 민감했던 그녀는 특히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고, 멜로디언이나 실로폰 등의 악기를 만지작거리며 자연스럽게 음악과 친해졌다. 그렇게 음악은 가장 즐거운 놀이가 됐고, 8살 무렵에는 정식으로 첫 피아노 레슨을 받게 된다. 하지만 전공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서 레슨을 그만두고 다시 하기를 반복해왔다. 수시로 피아노와 격조하는 동안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음악의 끈을 놓지 않은 그녀가 본격적으로 음대 입시를 준비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자신 앞에 놓인 모든 일이 그랬듯이 남들보다 물리적으로 배가 되는 노력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당당히 음악대학에 입학했고, 밝은 에너지와 도전의식으로 보이지 않았던 길을 스스로 선연하게 그려나갔다.

“20대 초반,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 끝에 미국 유학을 떠났어요. 유학 당시에도 역시나 힘들었죠. 안 보이고, 안 들리고, 말 못 하는 삼중고였으니까요(웃음). 그간의 일련의 과정을 떠올려보면 참 신기해요. 지금껏 뭔가를 하고, 누군가에게 음악을 들려드릴 기회가 생긴 것도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나만의 색과 메시지, 상상력으로 신선한 자극을 주려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힘들어서 못 버텼을 거예요.”

그녀가 걸어온 인간의 길과 음악의 길, 그 길목에는 소중한 인연들이 빛을 밝혀주었다. 그녀는 그런 모든 만남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라고 하면서 특히 자신을 인간으로서, 또 음악인으로서 진정한 성인이 될 수 있도록 깊은 울림을 주신 두 스승을 떠올렸다. 한 분은 서울맹학교에서 만난 선생님이고, 또 다른 한 분은 박사 과정의 지도 교수님이다.

“서울맹학교의 선생님은 정식 교사도 아니었는데, 헌신을 다해 저희를 자상하게 대해주셨어요. 늘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로 올바르게 키워주신 거죠.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성이 너무도 존경스러웠던 그분은 저에게 인간의 길을 가르쳐주셨어요. 박사 과정 때 지도해주신 교수님은 저를 음악의 길로 인도해주셨고요. 늘 저의 음악적인 가치관과 의견을 먼저 묻고 존중해주셨는데, 더 이상 레슨이 필요 없는 진정한 음악가로 독립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죠. 돌이켜보면 너무 일찍 만났어도, 너무 늦게 만났어도 문제였을 거예요.”

이처럼 그녀에게는 귀한 시절 인연이 또 있었다. 바로 소중한 두 눈이 되어준 동행자, 창조와 찬미, 그리고 조이(Joy)라는 안내견이다. 그녀의 발걸음이 머무는 곳마다 함께한 이들은 무엇보다 값진 선물과 같은 존재이다. 그녀는 이 경이로운 동행의 서사를 한 장 한 장 펼쳐나가던 중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창조를 떠올렸고, 잠시 말을 못 잇다가 눈시울을 붉혔다.

“찬미에게는 은퇴식이자 조이에게는 안내견 학교의 졸업식이었던 날, 이렇게 말했어요. 세상에 ‘창조’된 생명체를 ‘찬미’했더니 ‘조이’를 얻었다고요. 생각해보면 저는 이 친구들의 이름처럼 살아올 수 있었어요. 너무 감사한 일이죠. 찬미는 힘든 미국 생활을 함께했던, 박사 학위도 있는 친구예요. 제가 학위모를 씌어주면서 고생 많았다고 해줬죠(웃음). 서로 의지하며 견뎌낸 그 시간을 돌아보면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고마워요.”

누군가에게 어떤 가치를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까지 연주를 계속하겠다는 그녀는 ‘같이’의 가치를 되새기며 함께 멀리 가기 위해 더딘 발걸음이라도 하나씩 떼고 있다. 다른 연주자와는 차별화된 메시지를 전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바람으로. 그래서일까. 그녀는 음악인으로서 칭찬을 듣는 것도 좋지만, 인간적으로 선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말이 더 감사하단다. 자신에게 다른 장애가 생기더라도 결국 인간으로서의 가치만이 남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제 어려움은 극복 못할 거예요. 그렇다고 절망감을 안고 ‘어떻게든 이겨내야지’하는 것보다 삶을 긍정하며 제 일부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죠. 나름 적응하며 잘 살아왔는데, 여전히 모든 게 버거워요. 쉬운 예를 들자면, 화장할 때 아이라인을 세세히 그린다고 해도 확인을 못하니 불편하죠. 또 패스트푸드점에 가면 키오스크가 많이 있는데, 음성 지원이 안 되니 혼자서는 주문을 못하고요. 사실 별거 아닌 일인데, 별거인 일은 어떻겠어요?”

‘상상’, ‘계획’, 그리고 ‘도전.’ 그녀는 자신을 가슴 뛰게 만든다는 이 단어들을 되새기며 어제로부터 오늘로, 오늘로부터 내일로 건너가기 위한 자맥질을 하고 있다. 이 말들의 결을 삶의 결로 바꾸기 위해 새롭게 도전한 분야는 조향사와 사이클 선수. 실제로 다가오는 10월에 열리는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 사이클 선수로 출전할 예정이라고 한다.

“저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게 가장 두려워요. 인생은 단 한 번뿐인데, 음악만 하면 재미없잖아요. 그래서 피아노로 다져진 체력으로 사이클 선수에 도전하려고요. 운동을 워낙 좋아해서 피트니스로 몸도 만들고, 수영도 꾸준히 했어요(웃음). 요즘 잠실에서 사이클 훈련을 받고 있는데, 땀이 비 오듯 흐르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아요.”

그녀는 다시 음악의 길, 아니 인간의 길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자신 앞에 드리워진 장막을 하나 둘 거둬내며 삶의 행간을 내려놓는다. ‘인간이 먼저이고, 그다음이 음악이다. 인간을 위해 음악이 있지 음악을 위해 인간이 있는 건 아니다’라는 자신의 음악 인생을.

글. 김신영 편집장

사진 제공: 삼성화재

*숙명여대 피아노 전공 학사, 동대학원 음악교육 석사. 美 피바디 음악원(Peabody Institute of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석사, 위스콘신대학교(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 피아노 연주 및 교육학 박사. ‘21세기를 이끌 우수인재로 선정’ 대통령상 수상(2004).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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