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험이 힘이다!!!!! > - 클릭! 이 사람 / 이랑주, VDM연구소 대표

  “고향이 어데고?”
 “구룡포요. 과메기 아시죠? 제가 미스 과메기 출신이잖아요.”
 미스 고추아가씨는 있어도 과메기아가씨는 없다.
시장골목에서 만나는 할머니들과 쉽게 말문을 트는 내 나름의 방법이다. 포항에서도 한 시간을 더 들어가야 하는 작은 어촌 구룡포. 지금은 도로가 잘 정비되어 차가 막히지 않으면 3~40분 안에 도착할 수 있지만, 어렸을 때 시내로 나오는 비포장도로는 멀미와 공주부양을 부르는 최악의 도로였다. 그나마 이제는 과메기라는 특산품 덕분에 구룡포를 아는 사람들이 꽤 많아졌다.
 어린 시절 나는 신주머니를 들고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신주머니 대신 손에는 구정물 통이 들려 있었다. 그 이유는 마당에서 키우는 돼지들의 식사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아침 등교 시간에 잔반 바구니를 들고 학교 근처 식당에 두면, 하교할 때 식당의 남은 잔반이 들어있는 구정물 통을 집으로 들고 와서 돼지들에게 부어주었다. 형편이 조금 좋아져서 나중에 사료를 섞어 먹이긴 했지만, 돼지 수가 늘수록 잔반 구정물 통은 더 늘어났다. 덕분에 내게는 아직도 탄력을 잃지 않은 튼튼한 팔뚝이 있다.
돼지를 시작으로 마당에는 동물들이 한두 마리씩 늘기 시작했다. 식사시간이 끝나면 마당에는 돼지 똥, 오리 똥, 토끼 똥, 개똥…, 온통 똥 천지였다. 이 똥을 치우는 것도 우리 형제들 몫이었다.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물청소를 하지 않으면 이놈들의 암모니아 가스로 거의 질식 직전이었다. 새벽 5시면 모든 가족이 일어나서 아버지는 바다로, 엄마는 통조림 공장으로, 나와 언니들은 학교로 향했다. 그때의 부지런한 습관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사회생활을 할 때도, 공부를 할 때도 웬만큼 힘든 고난쯤은 거뜬히 넘길 수 있는 고통 극복 근육이 돼지를 키우던 그 어린 시절에 모두 형성된 듯하다.
 백화점에서 비주얼 머천다이저(VMD)로 활약하고 있을 때, 재래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상품진열을 바꾸어달라는 연락이 왔다. 2005년, 30여 명의 상품진열 전문가가 전국의 재래시장에 파견되어 시장의 풍경을 바꾸기 시작했다. 시장 환경은 생각보다 열악했다. 어떤 가게에서는 에어컨을 들어내자 수십 마리 바퀴벌레 떼가 출몰해서 간을 한번 들었다 놓았고, 그 옆 가게에서는 엄청난 높이의 쥐똥 무덤이 발견돼 기겁을 하기도 했다. 또 다른 시장의 생선가게에서도 벌레가 득실득실했다. 일을 진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청소부터 해야 했다. 손님이 오지 않는 시장에서 겨우 매대 몇 개를 두고 장사하는 분들에게 VMD는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그분들에게 당장 필요한 건 장황한 이론이 아닌 빗자루를 들고 같이 청소해줄 사람이었다. 사장님과 둘이서 팔을 걷어붙이고 하루 종일 쥐똥을 치우고 바퀴벌레를 때려잡으면서 매장을 깔끔하게 만들었다. 깨끗하게 치우고 나니 가게만 반짝반짝 빛나는 게 아니라 사장님과 나의 마음에도 희망의 빛이 반짝였다.
 백화점과 마트에서 근무하던 전문가들은 쥐와 바퀴벌레에 놀라서 돌아갔다. 그런 류의 생물들을 늘 보며 자란 나에겐 그까짓 것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할머니들이랑 같이 시골에 살며 산으로 들로 토끼풀 뜯으러 다니던 이야기를 나누며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분들의 마음을 얻고 나니 일은 저절로 진행되었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매출이 200%나 올라서 임대했던 상점을 구입한 사장님, 대박 매출로 TV에 단골로 등장하는 정육점 사장님, 과일 체인점까지 낸 사장님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들이 성공할수록 나도 덩달아 유명세를 타게 됐다. 그분들은 이랑주라는 사람의 도움으로 이렇게 잘됐다고 말해주었고, 그 결과로 책도 내고 방송도 나오고 칼럼도 쓰고 멋진 강연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고생에는 다 이유가 있다. 어릴 적 마당에 돼지를 키우면서 고생해보지 않았다면, 쥐와 함께 생활해보지 않았다면, 재래시장에 갔을 때 그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다. 머리로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몸이 흡수한 경험치를 따라올 수 없는 것이다.
 경험의 힘은 사람의 마음을 얻고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 죽을 것 같은 고생의 이유를 그때는 모른다. 내가 왜 가난한 어부의 막내딸로 태어났는지, 친구들이 모두 놀러 다닐 때 왜 혼자서 돼지를 돌보게 되었는지, 나는 30년이 지난 후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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