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환 요즘 사람들은 철없이 살잖아요. 때를 모르고 살아요. 특히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과 떨어져 있고, 흙에서 멀어지면서 자연 리듬에 맞춰 살던 삶이 어그러진 거죠. 저는 농사를 지으며 절기를 많이 활용하다보니 음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해요. 사실 태양력은 자연의 흐름을 담고 있지 않아요. 가령 아직 한겨울인 2월 4일쯤이 입춘인데, 흙에 사는 농부들은 피부로 느끼지만 흙을 떠난 아파트에선 입춘 봄기운을 느낄 수가 없어요. 봄꽃 피는 춘분에야 비로소 느끼는데, 이미 입춘이 한 달 반이나 지난 때란 말이죠. 입하, 입추, 입동도 다 똑같아요. 여성 월경주기도 달 흐름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더라고요. 말하자면 달이 물을 주관하는 거죠. 바닷물만 밀고 당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은 물로 되어 있으니까 우리 몸도 영향을 받는 거죠.
고미숙 농민들은 씨 뿌리고 싹틔우고 자라는 흐름을 통해 자신의 일상 리듬을 잡잖아요. 도시인들에게도 절기 변화를 적용할 수 있어요. 가령 곡우에는 정말 비가 오고 변화가 시작돼요. 딱 바뀌는 순간에 천지 기운이 다르다는 것을 느껴요. 관심이없으면 그냥 온도밖에 모르다 보니 모든 걸 기상이변이나 자연재해라고 말해버리는 거예요. 몇 십 년 만에 가장 높은 온도다, 이런 통계만 내잖아요. 절기마다 다르고, 그해 운기가 다르고 측량 안 되는 게 많거든요.
안철환 얼마 전 음력 기준으로 기상청 자료와 비교해 봤어요. 20밀리미터 넘게 비가 온 날을 음력으로 바꿔 봤더니 놀랍게도 그믐께 비가 많이 와요. 보름에는 비가 안 오고요. 장마 때라도 보름에는 비가 안 와요. 옛날 어른들은 이걸 농사에 적용했던 거죠. 비 올 때는 파종하는 게 아니거든요. 싹이 나려면 하늘 물 말고 땅 속 물이 중요하잖아요. ‘화(火’)기운, 성장 기운과 만나야 식물이 자라니까요. 이걸 발견하고 깜짝 놀랐어요. 지금 우린 이런 지혜를 다 잃어버린 거죠. 조선후기 실학자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나오는 입춘을 비롯해 무슨 날 비가 온다는 내용을 기상청 자료와 비교하니까 대략 80퍼센트가 맞더라고요.
고미숙 ‘풍(風), 한(寒) 서(暑) 습(濕) 조(操) 화(火)’로 나누는 육기(六氣)는 오늘날로 보면 ‘기상생태학’이에요. 가령 지난해는 계사년이고, 화(火)기가 주도했어요. 실제로 크고 작은 불이 계속 났어요. 사람들 사이 갈등이 많이 일어났고요. 숭례문이 불탔던 무자년 때도 큰 불의 해였거든요. 촛불집회도 일어났고, 용산참사가 났어요. 지난해는 작은 불의 해였어요. 큰 불은 안 일어났지만 계속 불이 났거든요. 이런 것이 그해 기상학이면서 사람 심리와 역사에 개입하는 방식이거든요. 이런 흐름은 안중에 없으니까 그냥 통계만 있는 거예요. 자연하고 어긋나는 삶이죠. 재작년에는 바람의 해였는데, 태풍이 4개, 5개 왔어요. 기상청에서는 그냥 100년 만에 오는 이변이라 말하고 말잖아요. ‘운기론’으로는 당연한 흐름이에요. 슈퍼컴퓨터만큼은 알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안철환 큰 흐름은 동양 지혜가 갈피를 잡고, 기상학은 기계를 통해 단기 예측에선 정확해졌다고 봐요. 잘 종합하면 좋은 지혜가 나올 텐데 큰 흐름을 모르니까 항상 불안한 거죠. 지금 서양달력 체계는 1년 흐름을 그저 수량으로 구분했을 뿐입니다. 자연 흐름이나 우주 흐름을 전혀 모르니까요. 주변에서 한의학이나 동양철학 하는 분들을 보면서 아쉬운 것은 뭔가 서양에 대한 강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느낌을 늘 받아요.
고미숙 제 생각에는 인문학에 무관심해서 그런 것 같아요. ‘역학’을 조금만 배워도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활용할 것이 많거든요. ‘명리학’도 사람을 이해하는 데 쓸모가 많아요. 그런데 오래 공부한 분들도 그것이 당당한 지식 체계라는 자신이 없는 거죠. 그러니 항상 방어를 하거나 신비화 하려고 하죠. 지금까지 20세기를 지배했던 서양 학문을 알면, 동양지혜와 견주고 접합할 수 있거든요. 저도 인문학자로 시작해 서양 학문이 어디까지 갔는지를 너무 뻔히 본 거예요. 서양학문이 절대 따라올 수 없는 것이 역학의 지혜거든요. 인간에 대해 과학이 뭘 예측할 수 있나요. 현대과학에서 말하는 ‘빅뱅’이나 ‘불확정성 이론’은 다 동양학이에요. 이미 2500년 전에 동양에서 다 말했던 거예요. 서양은 물리학 자체를 가지고 윤리를 못 만들어요. 물리를 안다고 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거든요. 동양에서는 그걸 알면 바로 유교, 불교, 도교의 지혜가 다 나오거든요. 서양 첨단 과학은 동양사상을 뒷받침해주거나 증명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봐요.
안철환 저도 ‘명리학’을 공부해볼까 했는데, 공부하다 보니 한계가 느껴졌어요. 잘못하면 추상 기호학으로 빠지겠더라고요. 따지는 것들이 어떤 자연의 근거, 현실 근거에서 도피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어쩌면 동양 학문이 신비주의로 갈 위험성이 있는 것 아닌가 싶더라고요.
고미숙 예전에는 그렇게 많이 쓰였어요. 현실이나 현장을 일탈하는 식으로요. 그런데 사실 실용학문이거든요. 요즘도 ‘사주단자’를 아무 의미 없이 교환하지만, 예전에는 어른이 다 따져보고 했거든요. 이중 잣대를 가지고 있어요. 궁합, 오늘 운세, 토정비결을 보며 실제 영향도 받아요. 심리 의존성이 큰데, 이것을 하나의 논리라든가 지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문학과 사주명리학을 결합해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라는 책을 냈어요. 운명을 안다는 건 내 안에 자연 리듬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내가 곧 자연이다’라는 말이죠. 올해의 운세란 올해의 운기와 내가 만나고 마주쳐서 나타나는 사건들이거든요. 그러면 내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사주를 보면 이 사람이 어떤 기운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가령 ‘내년에 공부나 관운이 들어온다’고 나오면, 올해 생기지 않았던 욕망이 생기는 거예요. 천지의 운기가 바뀐 것이죠. 자연 흐름에 따라 싹이 움터 자라고 물이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것과 똑같지는 않지만, 인간도 그렇게 감응해야 해요. 자연은 그대로 이걸 따라가잖아요. 하지만 인간은 잉여가 너무 많아요. 욕망이 너무 많기 때문에 충돌이 생기는 거죠.
안철환 저는 인간이 지금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새로운 의미의 ‘인클로저’가 일어나고 있는 거죠. 목축업 자본주의화를 위해 경작지 몰수해서 결국 토지 없는 농민들이 도시 하층 노동자가 되는 흐름이 계속되고 있어요. 자꾸 인간들이 자연에서 쫓겨나고 도태되는 것이죠. 농사를 짓다보면 사람들에게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봐요. 한 번은 귀농하기 전에 본 사람이 있는데 사람들이 잘 접근 안 할 정도로 인상이 아주 강했어요. 그 사람을 5년 동안 1년에 한 번씩을 봤어요. 전혀 모르다가 5년 뒤에 그 사람 얼굴이 바뀐 것을 알았어요. 첫인상하고 너무 달라요. 곰곰이 생각하니까 해마다 바뀌어 온 거예요.
고미숙 동물이나 식물은 거기에 상응하는 만큼 살아요. 그 이상으로 생명을 더 지속시키고 그러지 않잖아요. 최선을 다하고 아니면 그만이잖아요. 인간은 거기에서 항상, 그것을 뚫고 만들어 내려고 하잖아요. 그만큼 자연성을 잃어버리는 거죠. 그것이 낙원의 추방이고 상극의 매트릭스를 만드는 거죠. 인간은 시작 자체가 상극으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완성수인 10이라는 숫자는 없어요. 동물은 자기가 가진 만큼만 살다가 생을 마치니까 원한이나 미련이 없죠. 인간은 뜻대로 안 되면 그걸 기억하잖아요. 그것이 번뇌를 만들어 내죠. 그걸 이기기 위해 상생과 상극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삶이에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문명화 되어 어떻게 자연과 소통해야 하는지, 몸 안에 있는 에너지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잘 몰라요. 그러니 마음 안에 자연과 동떨어진 공간이 얼마나 많이 생겼겠어요. 고전 스승들이 왜 다 비우라고 말하는지 알겠더라고요. 비우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하지 않으면 욕망을 그냥 따라가게 되니까요. 노자의 무위자연도, 부처의 자비도 결국 비우는 거예요.
* 이 글은 2014년 1월호 <우리가 바라는 날들> 특집 글의 일부를 정리한 것입니다. < 작은것이 아름답다>의 더 자세한 내용들은 정기구독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출처] 작은 것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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