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박진홍 피디가 제작한 SBS다큐멘터리 <부모 vs 학부모>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학부모 노릇이 과연 처음 의도한 대로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따져 물었다. 열심히 하는데도 출구가 없는 교육의 답답한 지점을 짚어서일까. 프로그램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각종 상을 수상했다. 고질적인 한국 교육문제의 돌파구를 부모의 생각 전환에서 찾은 박진홍 피디에게 현실적인 도움말을 청했다. 글 김현미 기자 | 사진 백경호

 

박진홍 피디는 다큐멘터리 <부모 vs 학부모>의 내용을 정리해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표지 제목은 학부모의 ‘학’을 배울 학(學) 대신 가혹할 학(虐)으로 썼다. 학대 당하는 수준으로 경쟁에 몰린 대한민국 학생들 뒤에 성적을 볼모로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가 있다는 뜻이다. 박 피디는 방송에서 보여준 아이들의 모습보다 현실이 훨씬 어둡고 절망적이라고말한다. 그 또한 두 아이의 아빠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더 나은 교육제도를 물려주지 못한 어른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고백한다.

“교육을 바꿔 보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고 봐야죠. 살인적인 학습량을 줄인다든지 입시 제도를 손보겠다든지. 교육은 더욱 경쟁적으로 치닫고 아이들은 학대 당하는 수준으로 학교에서,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청소년 자살률은 높아만 가고요. 학대 당하는 아이 뒤에 학부모가 있고, 학부모 뒤에는 학대하는 사회가 있어요.”

열심히 시킬수록 공부를 안 한다
이런 말을 듣는 대한민국 부모 대다수는 억울할 것이다. 어떤 부모가 사랑하는 아이에게 가혹한 부모가 되고 싶을까. 한국과 같은 경쟁 사회에서는 어느 순간 방향을 잘못 잡은 부모의 사랑이 돌이킬 수 없이 멀리 흘러가기 쉽다. 잘못된 방향의 시작은 입시경쟁에서 불안을 느끼는 순간일 것이다. 박 피디도 그런 경험이 있다.
“중3, 유치원생 두 아이를 키우면서 별다른 사교육을 한 적 없었어요. 그러다가 직장 근처인 목동으로 이사를 왔는데 아내가 엄마들 모임에 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더라고요. 아내는 들어보지도 못한 교육 프로그램과 교구 등을 다른 엄마들이 필수코스라는 듯 자연스레 언급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비정상으로 느껴진 거죠. 그 말을 듣는 저 또한 불안하더라고요.아이를 그냥 놔둬도 되나 싶고. 이런 상황에서 의연할 학부모는 거의 없을 거예요.”

엄마들은 입시경쟁에 최적의 학부모가 되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한다. 학원비를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아이를 픽업하며 조금이라도 편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조수 노릇을 마다않는다. 학원설명회를 쫓아다니고, 스펙을 쌓을 수 있도록 아이 주말 스케줄을 짜는 것도 엄마의 일이다. 아이 교육에 밀착해 힘을 쏟기 위해 직장생활을 포기한 전업주부가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불안감을 원동력으로 최선을 다해 아이를 교육시켜 온 엄마들이 요즘 벽에 부딪히고 있다. 부모가 시간과 돈을 쏟을수록, 아이가 학원에서 시간을 많이 보낼수록 성적이 올라가거나 대학 간판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다.

“오히려 반대예요. 부모가 공부를 강요할 경우 엄마와 밀착되어 있는 초등학교 때까지는 엄마가 좋아하는 공부를 어떻게든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엄마보다 또래 아이들이 중요해지는 사춘기가 되는 순간 공부에서 손을 놓게 되죠. 이때 아이의 공부를 방해한다고 게임이나 휴대전화 사용을 금하기라도 하면, 아이는 폭발하고 맙니다. 게임과 휴대전화는 학원 때문에 친구를 따로 만날 일 없는 아이들이 친구를 만나는 유일한 통로거든요.”

공부보다 관계회복이 먼저다
아이 공부를 도우려고 한 행동이 오히려 아이를 공부에서 떼놓았다니, 열심히 살아온 부모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아이 공부에 무관심한 척이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박 피디에 따르면 부모가 열심히 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바로 아이와의 관계 회복이다.
“우리나라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다중지능상으로 공부 효율이 높은 아이들입니다. 논리수학지능이나 언어지능 등이 높은, 즉 공부가 적성인 아이들입니다. 모든 아이가 여기에 해당하진 않죠. 나머지 부류는 부모와 관계가 좋은 아이들입니다.”
부모와 관계가 좋은 아이는 자연스럽게 공부에 대한 내적 동기를 키울 수 있다. 심리학자 매슬로의 욕구 위계에 따르면, 공부에 대한 내적 동기, 즉 자아실현의 욕구는 안정적인 관계 욕구를 충족시켜야 생겨날 수 있다. 아이들은 가장 가깝고 가장 의존하는 존재, 즉 부모와의 관계가 안정적이어야만 공부할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프로그램 내용으로 뒷받침되었다. <부모 vs 학부모>에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를 잘한다는 서울대 경영학과 학생들을 인터뷰했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부모가 시켜서 공부한 게 아니라는 답변이 눈에 많이 띄었다. 예상 외로 컴퓨터 게임에 빠져 학업에 소홀하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부모는 공통적으로 아이를 ‘믿어 주었
고’, ‘기다려 주었다’고 답했다. 공부를 위해 컴퓨터 게임을 금지한 부모보다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이 걱정되더라도 믿고 기다려 준 부모, 오히려 게임 캐릭터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부모를 둔 아이가 더 좋은 성적표를 받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입시경쟁과 학벌사회라는 상황의 압력이 심각한 우리나라에서는 부모와의 관계가 더욱 중요하다. 시스템의 고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모가 상황의 압박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는 대신 압력 편에 서서 아이를 밀어 붙인다면? 이것이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자살과 폭력 사태의 이면이다.

대한민국 교육을 의심하라
아이를 다그치고 경쟁적인 시험 제도로 밀어 넣지 말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를 조장하는 한국식 교육이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부모 vs 학부모>에는 아이들이 나란히 운동장 트랙에 서서 달리는 장면이 나온다. 전력을 다해 달리는 아이들의 뒷모습은 힘들고 지쳐 보이지만 누구도 먼저 끝낼 용기가 없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런 죽음의 레이스는 아이들의 실력 향상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아이들에게 교육이 아니라 시험 준비를 시킵니다. 시험 점수만으로 개인의능력을 평가하는 유교적 전통의 영향이죠. 하지만 시험 결과로는 국가의 성공과 실패를 예상할 수 없습니다. 미국은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항상 하위권 성적표를 받지만 오랫동안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습니다. 개인의 성공과 실패도 시험 점수로 알 수 없어요. 아이에게 최고의 시험성적만 요구하는 학부모들이 들으면 허무할 테지만, 사실입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피사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아시아 나라들은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다. 정신적·신체적 건강, 창의성, 혁신, 재능의 다양성 등. 그래서피사 점수는 자신감이나 흥미도, 가치, 즐거움과 완전히 반비례한다. 프로그램 속 용 자오 오리건 대학 교수의 말처럼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더 많은 것을 가르칠수록 흥미가 떨어진다면 도대체 왜 가르쳐야 하는 걸까? 과학에 흥미가 없다면 제대로 된 과학자가 될 수 없는데 말이다.

혹자는 고도의 압축 성장을 해온 대한민국의 성공은 높은 교육열에 기댄 것이라고 강변한다. 일부는 맞다. 그러나 박피디는 우리의 다음 세대에서는 얘기가 달라질 것이라 말한다.
“우리 사회의 압축 성장은 교육이라기보다 값싼 노동력에서 나왔다고 해야 맞는 말일 거예요. 교육열의 영향이 있다면, 그건 우리가 후발주자로서 선진국들이 내놓은 숙제, 그러니까 그들이 앞서 나가면 이를 모방하며 따라잡는 일을 도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겁니다. 그것이 시험을 잘 치르도록 교육받은 사람들이 잘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나 사회는 변하고 있다. 부모세대의 계산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으며, 이대로 한국 교육의 부작용을 지켜보면서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직되고 성장하지 않는 우리 사회 또한 교육의 모순을 그대로 반영한다.
“우리 사회가 한발 더 나아가려면 지금처럼 후발주자로서 남이 낸 문제를 푸는 대신, 문제를 내기 시작해야 한다는 을 많이 들어보았을 겁니다. 여기서 창의적 사고를 요구하는 거죠. 그런데 십년 넘게 오지선다형 문제만 풀던 아이가 갑자기 다양한 창의적 답을 가지고 나온다는 게 상상이 되나요? 말이 안 되는 거죠.”

포기하지 않는 부모가 될 것
“저는 구조주의자라고 할까, 커다란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개인의 변화가 큰 의미가 있겠는가 생각하는 편입니다.교육의 문제 또한 그런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안타깝게도현재 우리의 교육은 나쁜 방향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시스템이 제자리를 찾기까지 마냥 기다릴 수 없는 부분이죠. 교육은 워낙 복합적인 문제라 개인의 노력과 사회를 바꾸는 노력을 함께 하는 게 맞아요. 당장 아이의 몇 년 뒤 미래의 이야기니까 넋 놓고 기다릴 수 없는 것이 사실이고요.”
박 피디 또한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자식 키우는 불안한 마음을 조금 위로받았다. 사교육을 많이 시키는 부모는 아니었지만 가슴 한쪽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는데 ‘이대로도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그가 제안하는 것은 성적보다 아이 자체에 관심을 갖고 관계에 집중하는 부모이다. 가혹한 학부모가 되지 않으려면 먼저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부모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부모들이 시스템을 바꿀 노력을 할 때라고 말한다.
“부모들이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핀란드 등 교육선진국의 제도 또한 부모들이 만든 거거든요. 이미 교육의 모순은 우리 사회에서 포화 상태이고, 지금의 교육 제도에 대한 부모들의 불신과 이탈을 보면 서서히 균열이 느껴집니다. 여기서 불안한 마음에 내 아이의 성적에만 골몰하며 시스템의 문제를 놓아 버리면 답이 없어지는 거죠.”
그의 말에 겹쳐, <부모 vs 학부모> 프로그램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미국의 교육심리학자 알피 콘 박사는 지금의 한국 교육이 평범한 아이들은 물론 많은 아이들을 밟고 엘리트 대학에 진학한 아이들에게도 결코 유리하지 않다고 말한다. 시험 합격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온 아이들은 행복과 지적 호기심을 강탈당하니 이를 강요하는 교육제도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 지금, 당장 학부모에서 부모로 되돌아오라는 강력한 경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