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세상이 조금씩 걸어옵니다 - 시인 곽재구

곽재구

 

 

꿈꾸는 세상이 조금씩 걸어옵니다

시인 곽재구

 

“좋은 세상은 혁명가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론만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마다 마음 안에 들어 있는 맑은 촛불을 잘 켜고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입니다.

각성된 인간의 노력들이 모아졌을 때

진짜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겁니다.”

 

종이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세요

 

지금도 저는 연필로 종이에 시를 써요. 당장 공책이 없을 때 영수증이든 신문지든 주위에 있는 어떤 종이든 거기에 떠오르는 생각을 옮겨 놓죠. 심지어 종이가 안 보이면 천 원짜리 지폐에 시를 쓴 적도 있어요. 조폐공사에서는 싫어하는 일이겠죠. 우스갯소리지만 제가 천 원짜리 지폐 가치를 문학의 향기로 더 높인 건 아닐까요? 학교에 있다 보니 자판기 커피를 먹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자판기 커피가 주는 어떤 위로 같은 것이 있더라고요. 어느 날 나는 뭘 줄 수 있지,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일회용’이라는 운명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고요. 그래서 종이컵에 시를 쓰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거예요. 찾아오는 사람들이 갈 때 하나씩 가져가죠.
 

가장 최근에 쓴 ‘해남’이라는 시에 ‘내가 처음 숫자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 사랑이 내게로 왔다 / 사랑이 찾아왔다 / 연필심 꾹꾹 눌러 쓴 한 줄의 시 / 피가 없는 혁명이 꽃바람 속으로 다가왔다’라는 표현이 나와요. 말 그대로 시는 ‘피 없는 혁명’이거든요. ‘연필심 꾹꾹 눌러 쓴 한 줄의 시’, 어쩌면 이게 내가 처음 만난 시이고, 그 시는 내 공책 위에 쓰여 있었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동시를 쓰기 했거든요. 만약 종이가 없었다면 그동안 내가 쓴 시들은 애초 존재할 수 없었을 겁니다.

 

고등학교 1학년 늦가을이었어요. 박몽구라는 시 쓰는 동기생 친구가 있었어요. 누군가 소개로 은행잎 날리는 교정에서 처음 만났어요. ‘내가 쓴 시 한번 읽어볼래?’ 하면서 호주머니를 부스럭거리더니 다 구겨지고 찢어진 종이 한 장을 내놓는 거예요. 시험지를 쭉 찢어 연필로 시를 썼는데, 지금도 기억해요. ‘여자는 데친 사과빛 얼굴을 하고 가을 속으로 떠나갔다.’ 충격을 받았어요. 나는 시는 꼭 원고지에 써야 하는 줄 알았거든요. 다 구겨진 종이에 쓴 시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모습은 상상도 못했으니까요. 어느 순간의 느낌이나 잔상을 그 순간에 만난 종이에 남기는 거죠. 그리고 ‘사과를 데친다’는 표현도 놀라웠어요. 나도 저만큼 열정 가득한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찾아왔던 것 같아요. 그 뒤로 시와 씨름을 하면서 지냈어요. 그 친구가 보여줬던 찢어진 종잇조각이 지금도 선명해요. 그것은 어쩌면 제 운명을 움직인 존재였어요.

 

1995년에 70일 가량 중앙아시아 여행을 했어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을 통해 러시아 모스크바로 흐르는 혼자 하는 여행이었어요. 여행 내내 글쟁이로서 사는 일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졌어요. ‘나는 누구인가’와 똑같은 개념이죠. 키르키즈스탄 수도 비슈케크에서 점쟁이 할머니를 만났어요. 원래 점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처음으로 점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이 앞에 앉으니까 돌을 굴리면서 눈을 감고 중얼 중얼 거리는 거예요. 통역을 해주었던 고려인 3세 아가씨가 깜짝 놀라면서, ‘선생님, 이 할머니가 지금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하더라고요. “종이가 보인다, 무수한 종이로 자신의 키를 넘어선 사람이다.” 라고 말한다는 거예요. 기가 턱 막혔어요. 저와 종이는 운명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었어요. 그 순간 제 마음이 녹았어요. 그때 너무 힘들었거든요. 내가 또 글을 쓸 수 있을 것인지 고민이 많았는데 다 해결되었어요. 종이는 그냥 제 삶에서 어쩌면 내가 연인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을 만큼 나와 가까운 존재였던 거예요. 생각해보니 종이와 어떻게 관련이 되어 있는 삶을 살았는지 한 번도 생각을 안 해봤던 거예요. 마치 공기 같은 것이었으니까요.

 

 

[출처] 작은 것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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