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이 뼝뼝 소리는 뭐예요?”
“뭐? 나는 안 들리는데. 무슨 소리가 난다는 거야?”
“뼝뼝 소리가 나요.”
“그래? 아! 연꽃 필 때 소리가 난다더니 그 소리인가보다.”
일본(동경예술대학) 유학 시절 학교 옆 시노바즈 연못을 산책하다가 난생처음으로 연꽃이 피는 소리를 들었다. 밤샘작업 뒤 가마불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피곤한 새벽이었는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그동안 쌓였던 유학 생활의 피로와 중압감이 비눗방울처럼 뼝뼝 터지며 싹 날아갔다. 연꽃이 피는 소리에 가슴이 설레어 내가 비눗방울인 양 그 소리를 따라 한참을 방울방울 떠다녔다. 이튿날 바로 박사과정 입학을 위한 주제를 연밥으로 정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의 작품의 주제는 늘 ‘자연’이었다. 내가 설레는, 웃는, 재밌는 것은 항상 ‘자연’이니까. 나에게 가장 예쁜, 빛나는, 선명한, 강렬한 심상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니까. 그런데 왜 그렇지? 아마도 보고자란 탓, 놀던 탓이겠지?
나는 열 살까지 계양산 자락의 임학리에서 자랐다. 시골살이 덕분에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만끽하며 뛰놀았다. 봄에는 산에 올라 아카시아를 줄기째 따 먹고, 호미 하나 들고 나가 들판에서 냉이를 캐며 놀았다. 여름에는 새콤달콤한 뽀루주(보리수), 시큼한 싱아를 따 먹고, 달착씁쓸한 칡뿌리와 아기 주먹보다 작은 마를 캐서 ‘이게 무슨 맛이지?’하며 맛보는 재미에 친구들과 들로 산으로 쏘다니며 놀았다. 종종 토끼풀을 땋아 팔찌며 목걸이를 만들어 치장도 하고 때론 무덤에서 미끄럼을 타다 잠시 풀밭에 누워 뭉게구름을 올려다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혼자서 심심할 땐 철조망에 앉은 잠자리를 양 손가락 사이사이에 가득히 끼워 친구들을 놀래주기도 했다. 그때는 하늘소와 손바닥만 한 도마뱀이 참 많았는데,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어 너무 아쉽다. 그리고 가을에는 감나무에 올라 가벼운 몸놀림으로 가지 끝에 매달린 감을 따는 즐거움이 있었다. 겨울에는 눈 덮인 언덕에 올라 대나무 스키를 멋지게 타는 언니를 부러워하며 대신 비닐포대로 엉덩이가 젖도록 타고 놀았다. 이토록 눈부시게 행복한 어린 시절의 추억은 자연스럽게  모든 작업의 바탕이 되었다.
<곤충합>은 백자 합의 뚜껑에 곤충을 앉혔다. 어린 날의 내가 살그머니 다가가 곤충을 잡을 때 느낀 그 긴장과 흥분, 설렘을 이 합을 사용하는 이도 합의 뚜껑을 열 때 느끼기를 바랐다. <하늘을 담은 그릇>은 꽃의 형태로 제작한 새하얀 그릇 안에 청자 유약을 부분적으로 발라 들판에 누워 올려다보던 그 하늘을 표현하였다. 맑고 깊은 색깔의 하늘이 나에게 평안함이었듯, 이 그릇을 사용하는 이에게도 그런 하늘이 전해지길 바랐다.
요즘은 작품에 꽃을 담고 있다. 강화도의 작업장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데 작업장 앞마당은 이른 봄부터 겨울이 오기 전까지 온갖 꽃들이 만발하는 ‘비밀의 화원’이다.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동네 개와 고양이는 물론 딱따구리, 산비둘기, 참새, 두더지, 두꺼비 심지어 고라니도 놀던 명소다. 하지만 내가 처음부터 ‘비밀의 화원’이라며 반기진 않았다. 처음 몇 해 동안은 작업장의 앞마당을 정원으로 가꾸려고 애썼다. 잔디밭에는 잔디만 화단에는 화초만 남기느라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아 잡초를 뽑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호미질 낫질이 지긋지긋할 뿐 쓸모없고 예쁘지도 않은 잡초는 건재했다. 그러던 어느 봄날이었다. 적당히 화사하고 따뜻한 날이었다. 화단의 꽃 중 무슨 꽃이 얼마나 자랐는지 살피는데 며칠 못 본 사이에 쑥 자란 한 무더기의 풀이 보였다. ‘이 풀은 뭐람!’ 풀이 하도 작아서 쪼그려 앉은 무릎보다 더 깊숙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 순간 “와!” 외마디 탄성을 질렀다. ‘조그만데 엄청 화려하네? 어쩜 색이 이럴 수 있지? 냄새도 예뻐! 이렇게 여리여리한데 야생이야?’ 꽃잎 사이사이의 빈틈마저 예쁠 만큼 완벽한 그 꽃은 ‘꽃마리’였다. 아, 이름도 예뻐.
‘꽃마리’를 만난 그 순간의 감동을 오롯이 전하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달개비, 냉이, 지칭개, 메꽃, 나팔꽃, 씀바귀, 뽀리뱅이, 양귀비, 찔레, 개망초, 청가시덩굴, 갈퀴덩굴, 라벤더, 강아지풀, 애기똥풀이 나에게 알려준 자연의 부드러움, 맑음, 청아함, 생동감, 찬란함이 사람들에게 오롯이 전해지길 염원하며 예(禮)를 다해 그릇에 꽃을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