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에 대학동창이 살고 있다. 특별히 약속은 안했지만, 오늘 아침 집근처 차이나타운에서 필라델피아 행 버스에 올라탔다. 왕복 4시간이라 밀린 빨래를 하듯 쌓아둔 생각을 정리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시간에서의 앞과 뒤는 우리가 정해놓은 숫자, 과거와 미래도 결국 한 원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니 버스 안 특유의 매캐한 냄새와 함께 오래전의 기억이 더 선명해진다.
“와! 엄청 싸다! 자판기 콜라 값이 35센트야!” 아이다호 감자로 유명한 보이지 정거장에서였다. 1984년 봄의 일이다. 여자 친구를 만나러 뉴욕에서 버스로 시애틀을 다녀오겠다고 하니 모두 말린다. 심지어 버스 매표소 아주머니도 “엄청 멀어! 왕복 일주일이 넘는데 괜찮겠어?”라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승차권을 건네준다. 맨해튼 42번가에서 떠난 버스는 시애틀까지 모두 35번 정거장에 섰다. 워낙 먼 거리라서 4~5시간 정도 주행한 후, 새로운 운전사로 바뀐다. 뉴욕을 떠난 지 이틀 후 솔트레이크 근처에 있는 소금호수를 지나갔다. ‘무슨 호수가 가도 가도 끝이 안보이네.’ 나중에 찾아보니 제주도 크기의 두 배가 넘는다고 한다. 해가 저물 무렵 들판에 붓으로 점을 찍어놓은 것처럼 저 멀리 검은 언덕이 보였다. ‘아니 저게 뭐지?’ 버스 가까이에 가자 검은 언덕은 수천 마리의 검은 소들로 변했다.
척 보기에도 승객 대부분은 나처럼 형편이 그리 넉넉해 보이지 않았다. 남루한 복장을 한 아저씨가 비닐로 싼 짐을 좌석 위 선반에 꾹꾹 끼워 넣는다. 앉으면서 나와 주위 사람들에게 밝게 인사를 건넨다. 자신을 사냥꾼이라고 소개한 한 할아버지는 내릴 때쯤 갖고 있던 사냥잡지를 선물로 줬다. 네브래스카주의 작은 마을에서 인디언 일가족이 타더니 화장실 옆 맨 뒷자리에 길게 자리 잡았다. 엄마는 아이들이 보채자 조용히 하라고 나무란다. 유타주의 솔트레이크를 지날 때는 남학생 한 명이 내 옆에 앉았다. 봄방학이라 부모님이 계시는 새크라멘토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나중에 그곳을 지나게 되면 꼭 자기 집을 방문하라면서 삶은 달걀 두 개를 건네고 내렸다. 늦은 저녁 이름 모를 마을을 지날 때 불 켜진 거실 식탁에 온 식구가 둘러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맞아! 밥을 함께 먹어서 식구라 부르는 구나.’
나처럼 무식하게 버스로 미국의 동서를 횡단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했는데, 맨 앞에 앉아서 뉴욕부터 한 번도 내리지 않은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콜로라도주의 작은 마을을 지나자 버스가 텅텅 비었다. 할머니가 뒷자리에 앉은 나를 앞으로 오라고 손짓한다. 옆에 앉으니 어디서 왔으며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고, 내가 미술 전공생이라고 하니 의외였는지 엄청 놀라셨다. 스케치북을 보여드리니 거듭 원더풀을 외친다. 할머니는 고향이 보스턴인데, 아직 미국을 구석구석 다녀본 적이 없어 캘리포니아에 사는 손자를 보러 가는 김에 비행기 대신 버스를 탔다고 한다. 연세를 여쭤보니 빙그레 웃으며 ‘구십’이라고 하신다. 듣고 있던 운전사도 와! 하고 감탄한다. 이때다 싶어 운전사에게 질문했다. “그런데요. 길이 좁은데 큰 버스를 이리 쉽게 운전해요?” 그러자 그는 “하다 보면 알게 돼” 라고 짧게 답한다.
여행은 또 다른 나를 만나러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버스는 산 넘고 들판을 지나 크고 작은 마을을 통과한다. 여러 곳에서 온 각기 다른 사람들이 타고 내린다. 그들에게 버스는 먼 길을 가게 해준 유일한 교통수단일 것이다. 새로운 사람이 옆에 앉아 같은 창을 바라보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짐을 챙겨들고 각자의 길을 간다. 일상의 모습이 인생의 여행으로 이어지는 장면이다. 우리 인생은 떠날 때 짐을 모두 두고 내린다는 것이 다를 뿐. 
시애틀까지의 버스 여행 이후 지금까지 차를 몰고 네 번 미국을 횡단했다. 서부지역에서의 작품 전시 때문이었다. 자동차에 작품을 가득 싣고 보통 4박 5일을 달린다. 일상에서 잠시 떠나 낯선 경치를 보며 나를 돌아보기 위해 직접 운전대를 잡는다. 그러면서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정확히 3천 마일이라는 것과 로키산맥을 넘기 전에 연료를 충분히 채워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작품 양이 많아서 제법 큰 트럭을 빌려서 몰고 간 적도 있다. 처음에는 큰 트럭이라 복잡한 시내를 통과할 때 겁이 났지만, 그때마다 “하다 보면 알게 돼”라는 버스 운전사의 말을 주문처럼 반복했다.
어느새 버스가 필라델피아의 차이나타운에 도착했다. 글쓰기를 다 마치고 버스에서 내리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방금 대륙을 달려온 기분이다. 정거장에 내리기 직전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아이고 미안, 강 화백. 내가 지금 뉴욕에 출장 와있네.” 그때 시애틀에서 만난 여자 친구는 그 다음해에 나와 결혼해서 지금까지 밥을 함께 먹는 식구가 되었다. 그 시절이 생각나 대학생이 된 아들과 버스를 타고 엄마가 살던 시애틀로 다녀올까 해서 인터넷으로 버스 요금을 찾아봤다. ‘아이고, 그동안 왕복 요금이 무려 8배 이상 올라버렸네.’


내가 아는것, 2017, 아르코미술관, 서울, ©안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