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에 대한 설렘이 사라진 것은 근래였던 것 같다. 모든 경험의 최초 기억들은 때가 되면 찾는 먼 선조의 무덤처럼 무덤덤하다. 생생했던 느낌과 기억은 비누처럼 닳아간다. 기억의 한구석에 정물처럼 남는다. 나이가 들면 처음 시작하는 일들이 줄어든다. 대부분 해본 일이고 자극 없는 ‘그럭저럭’의 하루가 돌아 어느새 주말인가 하면 또 금요일을 맞는다.
새로운 경험이 줄어드는 것에 비례해 시간은 가속화된다. 사실 시간은 변하지 않는 물리다. 기억의 문제일 뿐이다. 시간의 길이와 속도는 기억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나이가 들고 기억력은 줄어들고 반복되는 일상이 남는다. 20대의 10년 전은 30대의 10년 전보다 훨씬 길게 느껴진다고 하는데, 이것은 다시 생각해 봐도 결국 기억의 문제다. 감정에서 경험의 흔적으로 치환해가는 ‘첫’들은 결국 기억의 기억으로 남는다. ‘나이 들면 다 그런 거지’ 하기엔 좀 억울하고 섭섭한 일이다. 
올해 5월에 첫 시집이 나왔다. 내심 기대했지만 번거로운 일에 받는 스트레스가 기쁨을 넘었다. 시집 돌리는 일은 청첩장 돌리는 일보다 더 까다로웠다. 누구에게 부치고 말지도 큰 고민거리였고, 출판사에 누가 되지 않으려면 낭독회 같은 홍보도 필요했다. 스물 남짓 시를 꿈꾸던 내가 지금 나를 본다면 얼마나 실망스러울까 싶었다.
처음 시에 빠져든 것은 장석남의 시집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때문이었다. 대학교 4학년 교생 시절 한 선배가 그의 시집을 보여주었는데, 오래 잊고 지내다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밥 한 끼를 굶은 돈으로 그의 시집을 샀다. 종로 파고다 어학원에서 초록 조끼를 입고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이었다. 불투명한 미래와 현실 사이에서 제목에 있는 ‘간신히’라는 부사는 나의 상황이 압축된 듯했다. ‘간신히’란 단어에 마음을 투사하고, 읽고 또 읽었다. 여행을 갈 때나 버스에서 그의 시집을 데리고 다녔다. 읽을 때마다 다른 뜻이 보이는 게 신기했다. 간신히 시인이 되었고 간신히 시집이 나왔지만 그때의 ‘간신히’와는 전혀 다른 단어다.
시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시절 꽤 구체적으로 지금의 나를 상상해본 적이 있다. 등단을 하면 책을 내자고 이곳저곳 연락이 오겠지. 조용한 찻집에서 출판사의 편집자를 만나고 그는 은근하게 내 시의 세계관과 문장을 칭찬하며 계약서에 싸인 요청을 하겠지. 조금 쑥스러운 표정을 만들고 출판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지. 여유롭고 달콤한 마음으로 제목을 생각하고, 시의 순서를 정하면서 기분 좋은 스트레스를 받겠지. 책이 나오고 나는 몇 번쯤 서점을 어슬렁거리며 내 책을 집어 든 누군가를 만나기도 하겠지. 내 시를 읽는 사람의 눈빛을 조심스레 읽으며 기뻐하겠지.
엑셀 파일로 시집을 건넬 사람들의 세목을 만들고 오래 연락이 끊어진 이들에겐 자연스레 안부가 되겠구나 생각했다. 이런저런 미래의 나를 떠올리며 상상으로 시를 밀고 나갔다. 그 힘으로 여기까지 왔을 터다. 나의 시 선생님 k는 첫 시집의 기분을 만끽하라고 일러주었는데, 이렇게 덤덤한 일일까 싶다. 시집이 나오고 심지어 남들보다 늦게 실물로 보았다. SNS에 시 조각들과 인증 샷이 올라올 때 나는 먼 곳에 출장 중이었고, 출간 일주일 후에나 내 시집을 보게 되었다. 분주한 일 핑계지만, 활자화된 내 시집의 전편을 다 읽은 것은 또 보름쯤 뒤의 일이다.


‘첫’을 통해 펼쳐진 일들은 대부분 상상과 달랐다. 첫사랑이든, 첫 아이든, 첫눈이든, 첫 직장이든 세상의 모든 ‘첫’을 품은 말들은 대부분 시작하기 전의 기대와 환상을 포함한다. 지나고 나면 상상보다 좋은 경우는 드물었다. ‘첫’이라 이름 붙은 대부분은 ‘꿈’이 함의된 소실점이어서, 과장된 상상으로 마음이 이미 너무 멀리까지 갔기 때문일 것이다.
‘첫’을 꿈꾸기에 마음이 낡아 슬프다. 아니 뭘 해도 끝을 알 것 같고 또 그게 틀리지 않는, 재미없는 인간이 된 것이 슬프다. ‘첫’ 하고 발음하면 날카로운 소리가 난다. 성냥 긋는 소리가 난다. 기억의 어두운 공간에서 조심스레 성냥을 긋 듯 불을 밝히고 나의 희미해진 ‘첫’들을 애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