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인어공주를 위하여’가 올라 있었다. 25년 전의 만화책이 뜬금없이 왜? 알고 보니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여주인공 나정이가 이 책을 보는 모습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 장면을 뒤늦게 찾아보고는 희미하게 웃음이 일었다. 동시에, 기억은 20여 년간 쌓인 먼지를 걷어내고 단숨에 그때로 돌아갔다.
1991년, 스물네 살의 나는 머저리 같은 대학생활을 끝내고 방위병으로 끌려가 있었다. 대구 어느 군부대의 BEQ(하사관숙소) 관리병이었는데, 아침에 출근해서 다음 날 아침까지 근무하고 하루를 쉬었다. 그러던 석 달째쯤이었던가, 한밤중에 전화가 울렸다. 군기가 바짝 들어 전화를 받았는데, 뜻밖에도 젊은 여자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건너왔다. “저…. ○○○인데요.” “네?”
그렇게 잘못 걸린 전화를 계기로 그녀와의 통화가 시작되었다. 내가 근무하는 날이면 밤마다 어김없이 그녀는 전화했고, 나는 조막만한 관리실에서 모포를 덮고 쪼그려 앉아 새벽이 밝아오도록 통화를 했다.
그녀는 예민했고, 소라게처럼 껍질을 단단히 두르고 있었다. 이름을 묻는 것도 싫어했다. 자신의 연락처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혼자였고, 두 달간 방 밖에 나가질 않았다고 했다. 남녀관계로 발전할 기미는 전혀 없었다. 하루의 일상이나 잡다한 이야기들. 그런 무색무취한 대화가 몇 달간 이어졌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기도 하다. 그녀는 외로워서, 너무 외로워서 나와의 통화를 계속한 것 같다. 나 역시 진절머리나는 긴 밤에 사람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그녀는 차츰 밝아졌고, 농담을 하고, 웃기도 했다. 두 달 후 이름을 알고부터 조금씩, 서서히 자기 이야기를 털어놨다. 아르바이트 삼아 순정만화 스토리를 썼다고 했다. 이미라의 《늘 푸른 나무》, 《늘 푸른 이야기》. 나중에 안 거지만, 이미라 작가는 《인어공주를 위하여》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늘 푸른’ 시리즈도 못지않은 인기였다. 학원 로맨스물의 원형 같은 스토리인데, 귀여니 작가의 히트작 《늑대의 유혹》도 이 작품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물론 그녀가 정말 그 작품들의 스토리 작가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대구 K여고 선배라는 말이라든가, 앞뒤가 맞아 들어가는 구체성 있는 이야기들 덕에 당시의 내가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는 정도로 말해야겠다. 잘못된 말을 전해 혹 이미라 작가한테 누가 될까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럴 이유가 없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난 그녀를 직접 만났고 순박한 눈을 보았기 때문이다.
만나기까지는 조금 힘들었다. 몇 달간 통화했으면서도, 만나는 건 그녀 쪽이 주저했다. 부끄럽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곧 멀리 떠나게 되니 앞으론 전화를 못 할 거라고 했다. 몇 달이나 이야기를 나눴는데, 얼굴도 모른 채 끝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드니 궁금증이 폭발했다. 난 꾸준히 설득했다. 마침내 한 번의 펑크 끝에 만날 약속을 잡았다. 일본으로 떠나기 며칠 전이었다.
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운치 있기로 유명한 경북대학교 캠퍼스였다. 마치 촬영 실수로 일부가 지워진 사진처럼, 이상하게도 기억 속에서는 얼굴 부분만이 흐릿해져 있다. 단정한 스커트 차림의 그녀가 우산을 들었다는 것만이 생각난다. “실물을 보니 어때요?” 내가 물었다. “실망했어요.” 하하. 그녀다운 대답이었다.
밥을 먹고 교정을 거닐었다. 큰 나무 아래 우산을 쓰고 앉아 캠퍼스를 내다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본에서 만화 공부를 하고 돌아와 만화가가 될 거라 했다. 헤어질 때, 그녀는 직접 그린 패널을 내게 선물로 주었다. 총을 든 소녀의 그림이었는데 프로 못지않은 솜씨여서 놀랐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만화가로 데뷔하지 않은 것 같다. 한 번 들으면 절대로 잊지 못할 독특한 이름이다. 검색했더니 시골에서 평범한 주부로 묻혀 지내는 듯하다. 20여 년간 어떤 곡절이 있었는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알 수 없다.
취향이 다양한 사람들을 열광시킨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안다. 지금껏 책을 여러 권 썼지만, 여전히 소수의 마니아 분들만이 내 작품을 읽는다. 반면에 (그녀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그녀가 쓴 이야기와 캐릭터는 동시대 대중을 매혹했고, 모든 소녀들이 꿈꾸는 원형을 만들었다. 자신이 얼마나 굉장한 작품을 썼는지 그녀는 알고 있을까. 그녀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 있어 나 같은 사람은 비교도 안 되게 크나큰 재능을 가졌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작가로 활동하고 그녀는 묻혔으니, 아이러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길을 막아서던 시대, 처세에 서툰 예술가 기질, 낡은 관행. 그런 것들 안에서 수줍음 가득한 그녀가 만화가로 성공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으리라. 지금이었다면 조금은 다르게 살지 않았을까? 드라마의 한 장면이 나를 그때의 만남으로 데리고 갔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서글퍼지고 말았다.


약력
서울북부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재직 중이다. 2010년 《선택》으로 한국추리작가협회 ‘미스터리 신인상’을 수상하며 추리소설가로 데뷔한 이래, 《붉은 집 살인사건》 《유다의 별》 《가족의 탄생》 등 다수의 추리소설 및 법학 인문서를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