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는 사람들 중 대다수에게는 ‘핵의학’이 익숙하지 않은 단어일 것이고, 핵의학 의사를 만난 적도 거의 없을 것이다. PET, CT 등 핵의학의 대표적인 진단법이나 방사성동위원소 치료법은 대개 암을 비롯한 심각한 질병을 예방하거나 진료하는데 활용되고 있어서 많은 이들이 경험하는 것은 아니며, 핵의학 의사들은 다른 임상의학 분야와 달리 환자를 직접 대면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히 자부하건데, 아마도 나는 가장 많은 사람들을 만난 핵의학 의사일 것이다. 1970년대 초, 제도, 인력, 예산, 기구, 관련 산업, 인지도 등이 총체적으로 부족한 핵의학을 독립적인 학문으로 만들어보고자 결심한 이후, 40년 간 내가 가장 집중했던 것은 핵의학과 관련된 모든 분야와 협력관계를 쌓는 것이었다. 
특히 ‘핵’하면 무기를 떠올리는 사람들에게 핵의학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 병원, 학교, 정부, 기업, 연구소 등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만나 끊임없이 대화했다. 한때는 자주 연락하는 사람이 삼천여 명에 달할 정도여서, 만남 자체가 내 본업이 될 정도였다. 그렇다면 대체 핵의학이 뭐 길래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핵핵’거릴 수밖에 없었을까. 
핵의학은 1930년대부터 개념이 등장했으나 실제 본격적으로 이용된 것은 1960년대부터다. 우리나라도 1960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 방사성동위원소실을 설치하며 핵의학을 도입했다. 우리나라 핵의학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 의사 중의 한 분이 고창순 서울대 의과대학 명예교수님이시다. 고창순 교수님은 고(故) 김영삼 대통령의 주치의를 맡으실 정도로 뛰어난 내과 의사였지만 본인의 사명을 우리나라 핵의학에 뿌리를 내리는 것으로 삼으셨다. 
일찍이 일본과 미국 등 의학 선진국에서 공부하시면서 핵의학의 중요성을 깨달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서 핵의학 전문가를 양성하기로 결심하셨다. 당시 국내 수련의들은 동위원소를 하나의 연구 수단으로서만 받아들일 뿐 전공하려 하지 않았는데, 해외에서는 전업으로 하는 의사들이 빠른 발전을 이뤄내고 있었다. 그래서 고 교수님이 영입 목표로 삼은 대상이 학부생이었다. 이공계통에 관심이 있는 우수한 학생을 적극적으로 교육시켜 연구진으로 합류시키고, 장차 핵의학 전공의로 양성하겠다는 복안이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이미 알아챘겠지만, 내가 그 1호 학생이 되었다. 1972년 가을, 나는 서울대 의과대학 본과 졸업을 앞두고 일반외과와 산부인과 사이에서 전공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초등학교 동창이자 대학동기였던 친구 이승규(현 아산의료원 원장,  간이식 수술의 세계적인 권위자)를 따라 우연히 고 교수님을 뵙게 됐다. 첫 만남에서 교수님은 내게 가타부타 말씀 없이 붉은색 표지의 원서 ‘핵물리학(Physics of the Atom)’을 건네시며 물리학과 조교까지 과외선생으로 붙여주셨다. 
당시만 해도 핵의학은 독립된 진료과목이나 교실, 전문의도 없었고, 하나의 학문 분야로서 인정받지 못하던 시기였다. 의사들 사이에서는 핵의학을 ‘nuclear medicine’ 대신 ‘unclear medicine(불확실한 의학)’이라고 부르는 농담을 하곤 했다. 그랬기에 고 교수님도 주관적인 설명 대신 학문 그 자체를 제안했던 것이다. 그 만남 이후 고 교수님은 모험에 가까운 도전을 한 나를 위해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지만, 앞에서는 단 한 번도 내게 선택을 강요하거나 부담을 주지 않으셨다. 온전히 내 신념에 맡길 뿐이었다. 후에 고 교수님의 회고록을 보니, 미지의 학문으로 뛰어든 제자의 만용(蠻勇)에 기특함과 심려가 복잡하게 얽혀 있으셨던 듯하다.
나로서는 고 교수님과의 만남이 ‘무언가 새로운 것’, ‘남들과 다른 것’을 해보고 싶어 했던 타고난 ‘도전정신’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남이 그려준 대로 사는 것보다 백지 위에 내가 원하는 대로 그리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고 교수님께서 ‘핵의학’이라는 전혀 새로운 인생의 좌표를 찍어주신 거였다. 
이후 40년은 좌표만 있는 핵의학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시간이었다. 핵의학 분야가 학문적 독립성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핵의학교실과 핵의학전문의 제도를 만들었고, PET(양전자방출 단층촬영술)를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했으며, 국내외 여러 학술단체를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은사님의 1호 제자는 동위원소 분야에서 전일제로 근무한 국내 1호 의사가 됐고, 국내 최초 세계핵의학회 회장, 첫 의사 출신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 등의 기록을 남겼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등에서 핵의학을 배우던 우리나라는 지금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핵의학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은사님과의 우연한 만남이 수많은 또 다른 만남으로 이어지고, 그 여파가 백지였던 내 삶과 우리나라 핵의학에 남긴 무늬들을 들여다 볼 때마다 매번 가슴이 벅차오른다. 고창순 교수님과의 만남, 그리고 핵의학과의 만남은 내 운명이었다.


* 1948년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대학원 내과학 박사. 제45회 과학의 날 과학기술훈장 창조장(2012), 제1회 한국핵의학상(2011) 수상. 서울대 의대 교수, 가천의대 길병원 병원장, 제24대 국군수도병원 병원장 등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