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를 읽다 _ 아직 오지 않은 시간 _ 강해인

강해인, 영화평론가

산다는 게 참 힘들다. 언제는 쉬웠겠냐마는 지금 딛고 서 있는 이 세계는 유독 더 혼란스러운 것 같다. 하루도 빠짐없이 쏟아지는 강력 범죄, 시시각각 사상자가 늘어나는 전쟁, 그리고 그치지 않는 테러까지. 미디어가 토해내는 사건의 조각으로 세계를 재조립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바로 지옥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을 삐딱하게 인지하게 되는 것 같다. 은퇴를 결심했던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세계 앞에서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던 걸까. 2013년 <바람이 분다>을 끝으로 활동이 없었던 그가 돌아왔다. 제목부터 연륜이 느껴지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하 <그대들>)라는 작품으로 말이다.

11살 소년 마히토의 삶도 힘들다. 그는 전쟁으로 삶과 죽음이 언제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을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고,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를 사고로 잃어 내면이 붕괴되고 있다. 마히토는 죽은 어머니의 고향 저택으로 내려와 새엄마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지만, 소년은 어머니의 부재와 살아남은 자로서의 죄책감을 더 느낀다. 이런 마히토를 더 힘들게 하는 건 인간의 말을 하는 기이한 왜가리였다. 이 신비한 존재는 저택 인근의 탑에 살고 있는데, ‘마히토의 어머니가 살아있다’는 말로 소년을 더 힘들게 한다. 이 왜가리의 정체는 뭘까. 그리고 그 신비한 탑 안에서 마히토는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마히토는 여러 가지로 경계에 선 주인공이다. 어른과 아이, 그 어디쯤에서 전쟁을 체험하며 세상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소년. 그는 전쟁의 시대에 아파하지만, 이 전쟁 덕분에 아버지의 군수공장은 잘 돌아가 혜택을 얻고 있다. 또한, 소년에게 기대할 수 있는 순수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스스로 머리에 상처를 만들어 타인을 곤란하게 할 수 있는 악의도 가지고 있다. 선의와 동심이 가득했던 ‘지브리 스튜디오’의 주인공을 기대했던 이들에겐 낯설고, 다가가기 힘들었을 소년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번 작품은 불완전하고, 결점이 있는 인물과 망가진 세계에서 출발해 울림을 준다.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라 주목받고 있듯, <그대들> 곳곳에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들었던 작품과 삶의 궤적이 녹아 있다. 단순한 반복이 아닌, 지난 작품을 소환하면서도 더 깊고 넓은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있었다. 특히, 마히토의 할아버지가 건네는 13개의 돌은 미야자키 하야오(혹은 지브리 스튜디오)가 평생에 걸쳐 제련한 삶의 정수였고, 이를 쌓아 만든 탑이 무너지는 장면은 자신도 불완전했다는 걸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이름으로 하나의 시대를 개척했던 거장이 긴 침묵을 깨고 하고 싶었던 말, 그것은 씁쓸한 고백이었던 걸까. <그대들>은 먹먹한 이야기였고, 노년의 감독이 자기 삶에 보내는 태도 앞에서는 함께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비관적이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다. 할아버지의 완전한 세계를 부정하고, 붕괴를 목격한 마히토는 자신의 세상이 불완전할지라도 돌아가 친구들과 함께 이겨낼 거라 말한다. 이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다음 세대에게 바라는 점이자 응원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구세대가 구축했던 세계에 새로운 세대의 가능성을 맞추지 말고, 새로운 세상에 맞는 가능성을 찾아 미래를 개척해 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도 읽을 수 있다. 작품의 모호함 탓에 <그대들>의 호불호가 갈렸다고 들었다. 어쩌면 <그대들>은 삶의 방향성과 답을 제시하는 작품이 아닌, 삶의 희망과 의지를 말하는 작품이었던 게 아닐까.

“손자에게 남길 자랑스러운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는 노장은 그렇게 다음 세대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전했다. 악의로 가득 찬 이 세계가 구세대의 부산물이며, 현재와 미래의 소년들은 더 멋진 신세계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지옥 같은 현실 속에 울고 있을 이들에게는 미래라는 시간이 유독 어둡게 보인다. 나 역시 이 시대 속에 침전되어 간다는 걸 느끼기에 ‘힘내!’라는 무책임한 말을 건네기 어렵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빌려 이런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다. “세상의 불의와 적의에 지쳐있다면, 우리가 품고 있는 세계를 보자. 우리의 무결한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